고구려는 보편적으로 일부 일처제로서 지금의 우리네 
혼인 방식과 전혀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는데, 고위직 무관이나 고위직 문관인 경우에는
일부 다처제를 택했던 것으로 고구려 고분 벽화는 전해주고 있습니다.

태왕도 아닌 고위직에 있었던 신하들이 본처외에 
첩을 두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하기도 합니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대부분의 고위직 신하들은 일부 일처제를 
지켰다는 것을 알수가 있기도 합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수렵총 벽화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꾸며 보았습니다.

벽화에 보면 좌측에 세명의 여인이 앉아있고 
오른쪽에 별도의 평상에 남자가 앉아있습니다.
바로 이 남자가 무덤의 주인이며, 왼쪽 세명의
여인네는 무덤 주인의 부인들 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맨 좌측으로 두명의 부인이 같은 평상에
앉아있는데, 무덤 주인의 옆에 부인은 별도의 평상에 홀로
앉아 있습니다.
 


즉, 무덤 주인의 옆에 별도의 평상에 앉아있는 부인은
본처로서 그 서열이 첩들 보다는 높다는 것을 알수가 있고
다만 본처와 첩들간의 위계 질서는 바로 서 있지만 신분에
있어서는 동등하다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고구려의 벽화에는 신분이 낮은 자는 작게 그리고 신분이
높은 사람은 크게 그리는 것으로 신분의 높고 낮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수렵총 벽화에서 보여주는 본처와 첩들은 신분이
동등함을 나타내었기에 고구려의 부인네들은 첩이라 하여
신분이 천한 경우은 없었으며, 본처와 첩은 신분상 동등한
위치에서 남편을 보필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혼인 관계는 조선시대의 혼인 관계와 너무나도
비교되어 무려 천년전의 고구려가 천년후의 조선 보다도 훨씬
선진적인 혼인 제도를 지니고 있음을 엿볼수가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첩은 천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야 했으며
이는 지나의 법전인 대명률에 따른 것으로서 참으로 올바르지
못한 혼인 제도 이기도 하였습니다.

고구려 에서는 일부에 속한 고관 대작들이 일부 다처제를
택하기도 하였지만 본처와 첩들간의 신분적으로 매우 동등하게
대우하였던 것을 고구려 고분 벽화를 통해서 확실하게 엿볼수가
있음에 신기하기 까지 합니다.
Posted by 돈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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