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왕족, 귀족, 평민, 노비 순으로 신분적인 차이가 
극명하게 나뉘어져 있었던 나라였습니다.
심지어 고구려 고분 벽화를 보면 시녀나 하인들은 작게 그리고 
무덤 주인과 안주인은 크게 그렸음을 보아도 신분적 차이를 알수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느 벽화에는 스님을 안주인 보다도 작게 그린 것만 보아도
불교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였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중님들의 신분은
평민 수준 정도로 쳐주었음을 엿볼수가 있습니다.

귀족들은 모든 재산과 토지 및 노비와 신분조차도 저절로 대대손손
상속되게끔 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지위를 그대로 물려 받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적인 높은 위치를 이어 받으면서 귀한 대접을
받는대신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면 즉시 사병들을 거느리고 태왕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면서 전쟁에 참가하여 죽기를 마다않고 싸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전장에서 전사하는것 조차도 명예롭게
생각하여 가장 용감하게 싸운것도 귀족들 이었습니다.

마치 천년을 이어갔던 로마의 귀족들 처럼 전쟁이 일어나면 
군사와 재물을 몽땅 나라에 바치고 자신도 갑주를 입고 전쟁터에
나가서 용감하게 싸웠던 사람들이 고구려의 귀족들 이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고구려는 문관이나 무관이 따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문관이 무관이고, 무관이 문관이기도 하였습니다.

때문에 나중에 나이가 많아져서 은퇴를 하거나 중앙이나 멀리있는
요직에 높은 자리로 영전해 가게 되어도 최후에 높은 관직 밑에는
별의별 직위가 수없이 나열되게 됩니다.

즉, 젊은 시절부터 전쟁을 치루면서 전선을 떠돌다 보면 수없이 많은
장군직이 따라붙게 되는데, 이는 단순히 고구려 태왕이 하사한
장수 직책도 있겠고, 고구려와 우방이었던 나라의 왕이 하사한
장군 직책이 있는 등, 그야말로 수없이 많은 장군직을 지니게 됩니다.

즉 요즘에 누군가가 국방 장관을 지니게 되면 소대장 시절부터
군 복무에 관한 모든 직책이 나열되어 경력을 밝혀주듯이 고구려도
전쟁에 출전할 때마다 고구려 태왕이나 이웃 국가의 왕으로 부터 하사받은
장군직에 대한 명칭이 그대로 따라붙게 되는 것이지요.
 


때문에 덕흥리 고분의 주인인 유주자사 진의 장군직이
다음과 같이 나열되어 있는데 고구려에서 사용한 장군직도 있고,
대부분 중국식 장군 직책이어서 의문점이 많이 나온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고구려 뿐만이 아니고 이웃나라에서 왕이
우방국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그 나라의 뛰어난 인물에게 장군직을 주는 
경우도 다반사 였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유주자사 진은 사위건위장군, 좌장군, 용양장군 및
사지절동이교위 등의 직책을 역임 하였는데 사지절 동이교위나
용양장군 등은 북연의 고운왕과 같이 고구려에 친밀감을 지니고
있는 이웃의 왕이 진에게 하사한 장군 직책임을 엿볼수가 있습니다.

어느 사람들은 용양장군이나 사지절동이교위라는 직책은 지나식
직책이므로 유주자사 진은 지나 사람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 당시의 국제적인 국교 관계를 잘 못 이해한데서 발생된 오해
임을 알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덕흥리 고분의 주인공인 유주자사 진은 틀림없는 고구려
사람이며, 그 당시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 인의 파워를 짐작케 하는
수많은 지나식 직책도 겸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이는 지나땅의 약한 나라의 왕이 고구려에 잘 보이려고 고구려의
신하들에게 지나식의 장군직을 하사한 것에 불과 하므로 이상한
방향으로 의문점을 지닐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더구나 조선의 위대한 영웅이었던 이순신 장군도 명나라의 만력제로 부터
명나라 수군제독 이라는 엄청난 장군직을 하사받은 것도 같은 맥락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고구려 때는 고구려에 잘 보이려는 이웃 나라에서 장군직을
하사하였다는 점이 조선과는 매우 다른 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Posted by 돈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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