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과 공작으로부터 탄생된 봉황
닭이란 가축은 개와소, 그리고 말과 함께 수만년전 부터 인류와
어느 사람은 닭과 공작에 이어 극락조 일부분도
봉황에 합쳐졌을 것이라고도 합니다만...
대부분 맞는 생각으로 봅니다.
닭이란 가축은 개와소, 그리고 말과 함께 수만년전 부터 인류와
함께 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이미 1천 500여년 전의 고구려 벽화에는 개와 소와 닭은 물론
지금의 거의 모든 가축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도 이미
고구려 훨씬 이전의 시대부터 현재의 가축들이 인간과 함께
해왔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고구려에 들어오면서 부터는 닭은 유난히 신성시 되면서
상상의 새인 주작을 만들어 내었고, 그 후대에 이르면서 봉황이
만들어 지기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닭은 주작과 봉황의 원조인 셈인데
오늘은 봉황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광무황제 9년조에 만들어진 1전에는 봉황의 문양이 들어가 있다.>
닭이 봉황의 시작이라는 것은 옛부터 닭을 천계(天鷄)로
표현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닭은 태양신의 심부름꾼으로
여겼으며, 주작의 시작이기도 했기에 당연히 봉황의 시작은
닭으로 부터 라고 감히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럼 닭과 무엇이 합해져서 봉황이 되었을까요?
당연히 닭과 공작이 합쳐져서 봉황이 되었던 것이지요.
옛것의 봉황이나 요즘의 봉황을 자세히 보면 머리는 닭이요,
꼬리는 틀림없는 공작임을 알수가 있습니다.
어느 사람은 닭과 공작에 이어 극락조 일부분도
봉황에 합쳐졌을 것이라고도 합니다만...
대부분 맞는 생각으로 봅니다.
좀더 재미있는 표현을 사용하자면 우리가 요즘 명절날마다
펼쳐보는 화투를 보자면 오광 가운데 11월 오동광에는 닭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동짓달 '새해'의 해돋는 광으로서 11월의
오동광의 의미가 있다고 볼수가 있겠습니다.
더구나 오동나무는 봉황이 날아와서 앉는다는 나무로
여겨져 왔음으로서도 화투의 오동광은 새해의 해돋는
의미로 광중에 光 이었던 셈 입니다.
더구나 일본의 문화는 거의가 50%는 백제의 영향으로 오늘에
이르렀고, 나머지 50%는 고구려의 영향으로 오늘에 이르렀음을
모르는 이가 많은 것으로 압니다.
흔히 일본은 대부분 백제의 영향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백제땅과
가까운 지역은 백제의 영향을 받았으며, 반대로 백제와 멀고
고구려와 가까웠던 지역은 모두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던 것입니다.
나중에 신라가 반쪽에, 반쪽에, 반쪽도 않되는 한반도 땅덩어리로 혼자
독야청청 할 적에는 일본은 스스로 자립 할 정도로 백제와 고구려로 부터
많은 문화와 모든 기술을 전수 받았기에 그제서야 섬나라 일본은
나라다운 나라로서 제 구실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백제와 고구려의 영향을 듬뿍 받았던 일본은 가장 봉황을
제대로 지니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고, 일본 왕실의 전통 문양도
오동무늬로 삼았을 정도로 봉황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봉황만 대통령의 휘장으로 삼고 있을 뿐, 일본처럼
봉황이 날아 든다고 하는 오동문양은 일본에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봉황의 원조는 일본이라고 하여도 이에 당당히 맞설만한 자료나
능력 또한 지니고 있지를 못 합니다.
화투는 일본이 원조입니다만...
이곳 화투에서 나타내고 있는 11월 오동문양과 닭머리(봉황문)
문양만 보아도 일본이 봉황의 지존이라 하여도 한국은 손가락만
빨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음을 그져 안타깝게만 생각되게 할 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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