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 쯤에 이르러 다대포 첨사 윤홍신 장군이 수백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정발 장군을 지원키 위해 달려 왔으나 왜군의 엄청난 병력과
감당키 어려운 전투력으로 인해서 1천여명의 조선군과 수천명의 백성,
정발 장군과 윤홍신 장군은 2시간여 동안 처절한 항전을 하였으나 끝내
모두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불과 1천명이 조금 넘는 병사와 수천명의 민간인을 이끌고 왜군 4만여의
대군과 2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으니 그 전투가 얼마나 처절하고 참혹
하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지금도 부산진성이나 동래성 터에서 예리하게 잘린 두개골과
조총에 맞은 두개골이 발굴되는 것을 보았을 때 선조들이
우리땅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며 싸웠을지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한편 경상좌수사 박홍은 편제상 1만 2천여 명의 병력과 전함 75척을
지휘하고 있었지만 왜군의 엄청난 병력을 보자마자 동래성으로 도망쳤고,
유키나가의 1군이 동래성으로 진군을 시작하자 다시 도망쳐 버렸습니다.

한편 동래성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던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이각도 
왜군의 진격 상황을 보고를 받자 마자 도망쳐 버렸습니다.

박홍이 도망치면서 각 군영과 한양의 임금에게 왜군의 대대적인
습격을 통보 하였기에 그나마 다른 수영이나 병영에서도 허겁지겁
전투 태세를 갖출수가 있었습니다.
 


유키나가의 대군이 동래성으로 진격해 오자 동래 부사였던 
송상현 장군, 양산군수 조영규를 비롯하여 홍윤관, 노개방과
송봉수 같은 장수들이 결사 항전 할 것을 결의하고 유키나가의
대군과 사력을 다해 항전하였으나 왜군의 연속되는 조총 사격술과
백병전의 고수들에 의해서 모두 전사하였으며, 동래성 수만명의
백성들도 왜군과 싸우다가 모두 전사를 하였습니다.

한편 박홍이 도망가 버린 경상좌수영의 병사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으며,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한지 4일 후엔 경상도 관찰사
김수에게 왜군의 대군이 쳐들어 왔음이 전달 되었으며 김수는
즉시 한양의 임금에게 전라도 좌우 수군이 타도로 이동 할 수
있도록 요청 하기에 이릅니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지 7일만인 4월 19일이 되어서야 전라 좌수영의
이순신 장군에게 왜군의 대대적인 침략 사실이 전해지게 됩니다.

15일 후인 4월 27일에 이르러서야 조정에서 내려온 명령은 전라 좌우수영의
함대가 경상도로 이동해도 좋다는 작전권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조선의 조정으로 명령을 요청하고, 다시 조정에서 임금의
명령이 하달되는 동안 유키나가의 1군은 양산을 거쳐서 한양으로
진격 하고 있었으며, 2군의 키요마사는 경주를 거쳐서 한양으로
매우 빠르게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이럴 즈음에 제 3군의 나카마사는 4월 30일 김해로 쳐들어 왔고,
그 외의 왜군 군단들이 속속 경상도 지역으로 상륙하면서 사방으로
진격을 시작 하였습니다.

 

Posted by 돈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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