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과 관련된 역도들은 모조리 잡아다가 국문하라"는
선조의 어명으로 시작된 기축년(1589)의 역모사건은 정여립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참살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하였습니다.
한편 죽도라는 곳에 숨어있던 정여립은 관군이 포위하자
스스로 죽음을 택하여 자결 하였으나 그의 시신을 가져다가
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형을 집행하도록 하였으니...
의금부가 아뢰기를
"백관으로 하여금 서립(序立)케 하여 죄인의 형을 집행하는 것은
모든 군중이 죄인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지금 적신(賊臣)을
행형(行刑)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백관으로 하여금 서립케 하는 것이
마땅한 줄로 아뢰옵니다."
선조실록 23권(1589년 10월 27일)
이렇게 시작된 선조의 공포정치는 임진년 난리가 나기전 불과 3년
이었으니 조선땅은 서서히 참혹했던 전쟁의 참화속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이이의 10만 양병설은 선조가 가장 두려워 하던 것으로
'군부를 강하게 하면 자신의 보위가 위험해질 것' 이라는 태조의
유훈에 따라서 극도로 양병을 꺼렸던 것인데 선조의 의중과는
다르게 왜국의 히데요시는 '착!착!'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통신사로 1년간 다녀왔던 황윤길과 허성의 정확한 보고는
즉시 군대를 정비하고 양병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나 선조는
김성일의 말이 옳다고 판단하여 황윤길과 허성을 죄주게 하였습니다.
이 때쯤 대마도주의 아들인 요시모토는 그래도 상국으로 모셔왔던
조선의 위험을 차마 지나칠수 없다고 판단하여, 조선 선위사(宣慰使)
오억령에게 왜국은 반드시 조선을 칠 것 이라고 귀띰해 주었으며
오억령은 즉시 선조에게 보고하였으나 오억령은 국론을 어지럽힌
자라 하여 파면하고 죄주었습니다.
오억령의 자리에 심희수를 임명하였는데 요시모토는 역시 심희수
한테도 왜국의 침략 사실을 알려줌으로 심희수는 즉시 선조에게
보고 하였으나 이 또한 외면을 받았습니다.
이 때가 되어서야 유성룡은 이이의 양병설을 받아들였어야 옳았고
국가 안위가 매우 위중함을 느끼게 되어 유성룡은 정읍 현감을
지내고 있던 이순신 장군을 불러 앞 날을 상의 하기에 이릅니다.
"이공...
참으로 큰일이 아닌가 하오
지금 왜국은 단순한 침탈이 아닌 전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칠 것이란 정보가 사실인 듯 하오.
아!...어쩌면 좋단 말이오...
이이 대감의 양병설만 이루어 졌더라면 지금 이 사람의
마음이 이리 아프지 않으련만..."
"대감...
허면 이 사람이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모든 것은 이공에게 맡기겠오
이 사람은 이공이 전라 좌수사가 될 수 있도록
즉시 조치를 쥐할 것이니 그리 아시고 좌수사에
오르기 전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두시고,
전라 좌수영에 부임 하시거든 좌수사의 권한내에서
전쟁 준비를 철저히, 귀신도 모르게 해주시오"
전라 좌수영에 부임 하시거든 좌수사의 권한내에서
전쟁 준비를 철저히, 귀신도 모르게 해주시오"
"그리 하지요.
이 사람 또한 대감과 같이
왜국의 정세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있던 중 이었습니다.
마침 대감께서 그리 해 주신다면 반드시 철저한 준비를 해두겠습니다."
이렇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두 사람의 은밀한 대화는
2년 후에 조선 뿐 만이 아니라 명나라와 동북아가
전쟁의 참화에서 간신히 살아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