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연평해전
1999년 6월 15일 오전 9시 28분 연평도 서남방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이
우리 해군 고속정에 기습적인 선제 함포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김대중 정부의 해군 교전 수칙 및 절차는
김영삼 정부때 만들어진 것으로서 다음과 같았습니다.
1: 경고방송
2: 시위기동
3: 차단기동
4: 경고사격
5: 격파사격
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시위 및 포위기동과 함대간 충각 전술만 사용해왔던
우리 해군은 즉각 자위권 차원의 반격을 실시하였습니다.
포탄과 중기관총의 총탄이 빗발치는 아비규환의 14분 동안 남북한
최대의 해상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해전은 양측 함졍 20여 척이 대규모로
교전을 벌인 큰 규모의 해상 전투였었습니다.
이 연평해전에서 우리 해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북한의 해군은 2척이 침몰하고 3척이 대파되었습니다.
더구나 북한 해군은 수십명이 전사를 하였지요.
반면에 우리 해군은 2척이 경미한 손상을 입었고,
우리 장병들도 11명이나 부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연평해전은 휴전 후, 처음으로 있었던 대규모의 해전 전투에서
최초로 대승을 거둔 해전이었으며 완전한 작전과 교과서적인 전투로
평가하는데 전문가 들은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제1차 연평해전의 승리를 이루었던 해군 제2함대 사령관 이었던
박정성(朴正聖)장군은 뛰어난 작전 지휘를 통한 크나큰 승리를
나라에 안겨 주었지만 그 보답은 함대 사령관으로서의 임기도 다 채우지
못한 채, 해군본부로 좌천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 이유로는 연평해전 후에 남북 차관급 회담에서 북한측이
한국의 전투를 지휘한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하자 김대중 정부가
즉시 박정성 장군을 좌천해버린 것이지요.
어찌보면 한 부대의 사령관에서 해군본부로 자리를 옮겼으니
영전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이는 아무리 보아도 좌천으로
볼 수 밖에는 없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계속 북한이 서해에서 도발을 감행할 것이란 것이 감지되었고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 해전을 승리로 이끈 장군을 교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김대중은 국가 원수로서의 자격을 스스로 버린셈이며
그의 햇볕정책은 종북정책으로 밖에는 설명이 않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김대중을 잊으면 절대로 않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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