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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5.21 원균이 이순신 장군보다 뛰어난 용장이었다고? 그 진실은 무엇일까? 34

역사에 대한 기록을 수박 겉핧기 식으로 읽고서 그것이 진실인양
주장하였다간 낭패를 당하기 쉽상 입니다.
따라서 역사의 기록을 읽으면서 그 당시의 상황을 
곰곰히 추론(推論)하여야 된다고 생각 합니다.

더구나 많은 부분에서 정확한 역사 지식을 전해주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잘못 된 부분들이 많이 수정되고 
새롭게 배우는 부분들이 제법 되는 듯 합니다.

아무리 지식이 풍부하다 하여도 자신이 알고있던 부분이 
어긋나거나 또는 잘 못 알고 있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이런 것은 많은 분들과 유익한 토론을 통하여 수정되고 
또 많은 사람에게 전달을 해줄수가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일부의 비상식적인 사람들이 
쓸데없이 딴지를 걸거나 별로 도움되지도 않는 소설 몇 줄 읽고는 
원균이 맹장이니 일등공신에 올랐으니 그래도 나라를 위해 싸운
충직한 장수였느니 하는, 참으로 보기가 민망한 글들이 제법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싸우긴 싸웠지요...
하지만 아군에 도움이 되거나 또는 나라에 도움이 않되는 
즉 자신의 전공이나 챙기기 위해서 이미 전라좌수군의 함포사격에 
전투력이 상실된 왜 함선에 돌격하여  전공을 가로채는 행위도 싸운 건 맞을 겁니다.
이러한 자를 장수라고 하는 것조차 민망하지도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원균이 맹장이나 용장이 아니라 조선 팔도에서 봉기한 
의병장과 그의 병사들이 맹장이요, 용장입니다. 
농기구 대신 창과 칼, 그리고 죽창을 들고서 죽기로 각오하고 
추운 눈밭을 동상에 걸려가며 구멍 뚫린 짚신을 신고서
왜군 정예병에게 달려들었던 우리의 이름 없는 할아버지들이 
맹장이고 용장인 것이지, 계집 끼고 자신의 선실에서 술 퍼마시면서 
걸핏하면 이순신 장군을 헐뜯고 술 주정을 한 원균을 장수라고 한다면 
이는 잘못되어도 너무나 잘못 되어진 사실입니다.
 


원균은 처음 무과에 급제했을 때는 젊은 무관으로서 제법 무인다운 행위를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십년 후에 임진란에 와서는 50이 넘은 중(中)늙은이가 된 고로 
아마도 음흉하고 간사스러운 말종으로 변하여 정치 세력에 결탁하여 각종 뇌물과 
사탕발림의 서신 등으로 자신을 무지하게 PR(선전)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또한 자신의 출생에 대한 열등감으로 백성들이 잘 따르는 신하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던 선조와도 그 사이클이 흡사하여 마치 톱니바퀴의 날이 
착착 맞아 돌아가듯이 그 짝짝꿍 수준이 매우 같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원균이 별의별 해괴한 짓거리를 해도 선조가 원균을 두둔했던 것은 
선조 자신에게 매우 입맛에 맞는 신하였기에 그러했을 것이지요.

원균이 치명적인 결함을 보였으며 장수의 자격조차 없었다는 것은 
모든 것들은 제외하고 딱 2가지만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우선 임진란이 발발(勃發)하자 원균은 엄청난 왜군의 공세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피할 궁리를 하게 되는데 
그냥 도망했다가는 나중에 목이 잘릴것을 두려워하여 
군령에 예시된대로 도저히 맞서 싸울 수 없을 정도로 
적이 강세 하다면 지휘관은 아군의 모든 무기와 군량미를 
적에게 넘겨서는 않되므로 자파하거나 불태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기에 즉시 전령을 각 수하 지휘관들에게 보내어 
군량미와 무기, 함선을 자침 시키거나 불태우라고 명령을 내렸을 겁니다. 

그리고는 모든 수군을 해산까지 시켰다고 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물론 경상좌수영도 똑같은 짓거리를 했지요.

원균의 경상우수영은 그 당시 전투함만 무려 80여척에 이르고 
수군이 1만이 넘었다고 하니, 전라좌도, 우도수군을 
합한 것 보다 많거나 비슷했을 겁니다.

이 모든 전력(戰力)이 불타거나 파괴되어 침몰되고, 
많은 무기와 군량미가 소실되었습니다.
그리고 원균은 본영의 판옥선 3척과 1천여명이 넘는 
본영 수군을 싣고서 꽁지가 빠지게 안전한 곳으로 도망을 가지요.

Posted by 돈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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