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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5.31 원균을 잡아다가 곤장을 쳤던 도원수 권율 장군 51

임진왜란 당시 권율은 문신으로서 분연히 일어나 
광주목사로서 처음으로 전투에 참여하게 됩니다.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은  
권율의 임진나루를 확보해야 한다는 건의를 무시했다가
왜군의 복병에 걸려서 패전하였고, 권율은 다시 광주로 되돌아 갔습니다.

이후에 전라좌도 도절제사로 임명되어, 금산군 이치(梨峙)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크게 박살내고
호남을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전라도 순찰사로 승진 합니다.

1593년 2월에 승병 500여명과 자신의 정예병력 2300여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주둔하였으나 왜군 3만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군과
백성들이 한몸이 되어 처절한 전투를 벌인끝에 크게 이겼습니다.
 


이 행주대첩이 바로 진주성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3대 대첩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지요.
그 당시 행주산성의 싸움은 얼마나 치열 했는지 화포의 화약과
탄알이 모두 떨어지고, 화살이 떨어지자 뜨거운 물과 재를 왜군에게
뿌리며 남자들과 병사들은 부인네와 노인, 어린아이들이 가져온
돌맹이로 돌팔매를 이용하여 전투를 하였다고 하지요.

행주산성의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권율 장군은 전투를 하는 모든
병사와 남정네들 한테 재를 두둑히 담은 재 주머니를 차게 하였는데
권율 장군은 이미 근접전까지 예상하였던 것 같습니다.

재를 뿌릴 정도라면 바로 코앞에서 왜군과 전투를 했다는 증거인 셈 입니다. 

얼마나 긴 시간동안 돌팔매로 전투를 하였으면 아녀자들이
차고있던 
행주치마에 돌을 바리바리 담아 날랐겠습니까?
그래서 행주산성이란 아픔이 느껴지는 이름까지 얻었지요.

부녀자들이 행주치마에 돌을 날랐다는 내용이 사실인지, 그리고 돌팔매로
전투를 하였다는 내용이 사실인지, 아니면 정상적인 전투를 하였는지는 알길이 없겠으나
행주산성 싸움이 3대 대첩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백성과 병사들이 서로 일치단결하여
왜군의 3만대군을 철저히 물리쳤다는데 그 의미가 큰 것입니다.


이렇게 큰 전공을 세운 권율은 문신이면서 위대한 장군이 되었으며 
그해 6월에 도원수(都元帥)로 승진하여 3군을 통솔하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3군이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의 모든 육군과
수군을 총괄하는 직책이었기 때문에 그 힘은 막강하였습니다.
 


한편 이순신 장군이 억울하게 투옥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던 것인데, 원균이 조정과 도원수의 여러차례 출전 명령을 
거부하게 됩니다.

원균이 출전을 거부한 이유는 함부로 움직이면 왜군의 함정에
빠지게 되어 위험하다는 것인데 권율 장군이 바보도 아니고
그 당시 권율 장군이 전투를 치루면서 사용한 병법이나 
전술을 보면 상당한 지략을 지닌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는바...

원균의 출전 거부는 위험해서 출전하면 않된다는 것이 아니라
접대부를 끼고 자신의 선실에서 술판을 자주 벌이던 원균이 겁을 먹고 
어거지로 부산으로 출전했다가 여러척의 선박과 400 여명의 조선 수군을
희생시키고, 꽁지가 빠지게 칠천량으로 도망오자  격노한 권율 장군이
원균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면서 호통을 치기에 이른 것입니다.

조정에서야 무능하고 어리석은 관료들이 많을 테니, 위험한 출전 명령을
내릴수도 있다고 볼수가 있겠으나 도원수 권율 같은 이가 아무리 해전에는
경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름대로 뛰어난 지략가 인데 원균보다야 못할까?
싶습니다.
 


결국 여러 내용에서 보였듯이 원균이는 겁을 먹고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은채
출전을 거부하며 항명을 하던중 부산으로 대함대를 이끌고 싸우러 나가더니
도망쳐온 칠천량에서 무적함대인 조선 수군을 한방에 몰살 시킨것은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원균은 왜적의 전함과 용감하게 맞서 싸우다가 전사를 한것이
아니라 200여척이 넘는 대 함대와 수만명의 조선 수군을 버리고 뭍으로 
달아나다가 왜적에게 참살을 당한 내용이 선전관 김식(金軾)의 보고 내용에
자세히 나와 있기 때문 입니다.


그 당시 전투 현장에는 왕명으로 함께 동행하였던 선전관 김식(金軾)이
있었으므로 가장 정확하게 왕에게 보고한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김식은 조선 수군이 궤멸될때에 원균이와 함께 뭍으로 달아났다가
살아나서 조정에 도착하는 즉시 왕에게 직접 보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그 내용입니다.

“전하 신 김식이가 감히 아뢰옵니다.
15일 밤 2경에 왜군 전함 5∼6척이 갑자기 습격하여 불을 지르니 우리나라 전선 
4척이 불에타 침몰되자, 우리의 장수들이 급하게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아오나
닭이 울 무렵에는 헤아릴수 없이 엄청난 왜군 전함이 몰려 와서 겹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는 물론이고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린 것을 확인 하였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수군)는 한편으론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 하였사오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의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사온데,  
왜군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며 공격해 오니, 마침내 우리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많은 장수들과 수군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사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도망하여 상륙했사온데 
원균은 늙어서 걷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도망 하면서 잠시 뒤를 돌아보니 왜병 6∼7명이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사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 및 안골(安骨)의 만호(萬戶)등은 
간신히 배를 몰고 탈출하여 목숨을 보전하였사옵고, 우리의 수많은 전함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사오며, 무수한 왜군 전함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사옵니다.”
 
(선조 30년<1597 정유>7월 22일자 선조실록)


선전관 김식의 보고 내용중에 '원균이 늙어서 걸음조차 걷지 못했다'는 내용을
보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입니다.
아무리 늙었기로서니 삼도수군통제사나 되는 자가 걷지도 못했다?
아마도 '완전히 겁을먹고 오금이 저리고, 다리가 후들거려서 걷지도 못했다'가 맞을 겁니다.
Posted by 돈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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