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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3.01 삼일절과 유관순 열사 2
                                             열사 유관순



이백하(李栢夏 1899-1985) 선생의 아우내 장터 독립선언서 일부중...
"2천만 민족이 있고 3천리 강토가 있고 5천년의 역사와 언어가 뚜렷한 우리는 
민족자결주의를 기다리지 않고 원래 독립국임을 선포하노라...하늘은 의로운 무리를 
도울 것이며 귀신은 반드시 극악무도한 자를 멸할 것이니 동포여 주저할 것 없이 
오늘 정오를 기하여 병천시장에 번득이는 태극기를 따르라... 
기회를 놓치면 모든 복도 가노니 두 주먹을 힘차게 쥐고 화살같이 모이라...
기미년 4월1일 구국동지회 대표 일동"
  
오늘은 삼일절 입니다.
그래서 인지 조국 독립을 위한 순국선열들의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져옴을 주체 할 수가 없군요.
 


갑자기 유관순 열사의 글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우리가 백범선생부터 안중근의사 등등 수많은 독립운동 하신 
분들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당연히 으뜸은 
유관순 열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이유로는 불과 17세의 나이로 수많은 
군중들을 이끌며 만세 운동을 펼쳤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요즘 17세면 부모에게 어리광이나 부리며
좋은 휴대폰 사달라고 졸라대는 철부지에 불과 합니다.
그러한 나이에 왜경과 헌병들 한테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하면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분이십니다.


어른이 아닌 어린 소녀의 몸으로 독립만세운동을 펼친 유관순 열사 였기에
더욱 존경해야 하고, 더욱 많이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는 워낙 잘 알려져서 새삼 알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만 그냥 한번 읽어보시고 관순 열사를 한번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글 내용이 길어질 것 같아서 대부분 아는 내용이라 생각되어 중간에
글들은 모두 생략하고 후반부만 올렸습니다.

 중략...
 
아우내 장터는 미리 알고 찾아온 군중과 장사꾼으로 새벽 3시가 
되기도 전에 3천 군중이 하얗게 모여들었습니다. 

이 때, 유관순 열사는 군중들의 행렬을 정돈하며 우리의 국기를 나누어주고 
소리 높여 독립을 부르짖으며 행렬의 선봉이 되어 프랑스의 순국소녀 잔 다르크 처럼 
나라를 위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고 기도하던 평소의 꿈을 
실행하면서 행렬을 이끌고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다가 장터 복판에 이르러서는 
쌀섬 위로 올라가 우리 독립의 중요성과 반드시 쟁취해야 한다고 군중을 
격려하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 나라를 강제로 합방하고 온 천지를 활보하여 
우리에게 잔인한 학대와 모욕을 다하였습니다. 
10년 동안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라며 
 


힘차게 외쳤고, 곧 이어 조인원이 단상에 올라가 눈을 부릅뜨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어 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했고 감격과 흥분에 휩싸인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며 가두 행진을 하였습니다.  

어느새 왜경들이 들이닥쳤고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왜국 헌병이 
관순 열사의 연설을 저지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속하므로 왜국 헌병이 
휘두른 칼에 맞은 유관순 열사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이러한 사건으로 유관순 열사의 부모까지 총살을 당했으며 
결국 관순 열사는 사랑하는 부모를 잃고 말았습니다. 

왜군은 관순 열사를 체포하였습니다. 
그녀는 천안 헌병대를 거쳐서 공주 재판소로 넘어갔습니다.  
검사국은 관순 열사에게 갖은 고문을 하는 동시에 처음에는 어린애로 생각하고
배후를 
추궁해 보았으나 굳게 다문 관순 열사의 입술은 주모자가 자기라는 것 외에는
더 말하지 
않았기에 아무 비밀도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한국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는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 

결국 관순 열사는 3년형을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하지만 유관순 열사는 왜인들이 판치는 이러한 세상에서는 삶의 가치를 얻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옥중에서도 조석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동지들을 격려하고 고무하며 그때마다 죽도록 매를 맞았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습니다.

관순 열사는 오랫동안 계속 된 고문과 구타, 그리고 영양실조로 마침내 1920년 9월 28일 
그렇게 목매어 외치던 조국의 독립도 보지 못한 채 꽃다운 나이 18세에 서대문 형무소의 
어두운 감방에서 순국을 하였습니다. 
 
그 후 1962년 3월 1일 국가에서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을 수여하고 관순열사의 
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1969년 추모각을 건립하고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 230호로 지정하였습니다.

Posted by 돈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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